해밀포럼을 처음 시작할 때 첫 발제를 맡아 주신 박제성 연구위원님을 한 번 더 모시게 되었습니다. 최근 집필하신 책 제목이기도 한 "하청노동론 : 노동계약의 도급계약화 현상에 대한 법학적 분석"에 대해서 발표를 듣고, 참석하신 분들의 의견을 서로 나누면서 많이 배웠던 포럼의 장이었습니다.
다음은 제23차 해밀포럼에 참석해 주셨던 장범식 변호사님께서 작성해 주신 후기입니다.
해밀뉴스레터 제7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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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사람, 법학과 예술
장범식 변호사
(제11회 해밀 아카데미)
제23차 해밀포럼이 2018. 9. 14일 금요일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해밀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포럼이었고, ‘하청노동론’이라는 주제까지 저를 설레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하청노동에 관한 법령과 판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저의 얕은 예상은 처음부터 산산히 깨졌습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노동은 피에 묶여 있거나(노예), 땅에 묶여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땅으로부터 떼어 내어 돈에 묶으면서 노동을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화폐로 매개되는 노동 관계에서는 표상의 다양성이 제거됩니다. 벽돌공의 노동과 변호사의 노동은 등가의 화폐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노동이 돈으로 환산되었고, 하청노동은 노동을 더욱 교묘히 돈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이용해 일을 맡아주는 하청업체를 구하고, 하청업체를 교체하는 것은 사람을 해고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하청업체에 별도의 인격을 부여하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해당업체를 교체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인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더욱 간접적으로 만들고 추상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그 사이에 파고들 수 있는 인간성이나 윤리의식, 죄책감 등의 인간의 감정 또는 감성에 대한 문제를 제외시키게 됩니다.
게다가 기업이 인격을 가지고 활동한다고 보면서 더욱 쉽게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윤만 추구하는 사람은 (점차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회의 가치에 반하는 사람으로 비인간적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반면에 회사는 이윤 추구가 목적으로 여겨지고, 이윤의 과다가 그 회사의 가치가 됩니다. 회사의 목적과 가치가 이렇게 정의되면서 노동의 문제가 회사의 이윤과 부딪히고 모순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거대 대기업은 자신의 이윤을 사회적인 것처럼 만들어 노동의 문제를 사회악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정주민에서 유목민으로 변화’라는 표현과 같이 기존의 고용 상황과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보장 제도의 변화가 진정한 안전망으로 점차 역할이 커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인출권에 대한 고민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서 중요성이 커져가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인출권’이라는 개념은 생소하긴 했지만 노동 3권의 개념이 기존의 노동자들이 조직하는 노동조합 중심의 활동에서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의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변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면서도, 실제로 진행 중인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용자와의 싸움에 중심이 되어있던 기존의 노동운동이 이제는 국민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 사회적인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가야한다는 것은 꾸준히 주장되던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단기간에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현대의 디지털커뮤티케이션 시스템에서 개인이 스스로 메신저 역할을 하여 촛불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일응 공감이 되면서도, 그러한 촛불이 정말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회가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모두가 신자유주의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지 신자유주의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는 박사님의 말씀에는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이야기에 촛불이 반기를 들고 있지 않다면 논쟁은 사라지고, 당연한 전제가 되어간다는 모습은 생각해보면 많은 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촛불의 힘에 회의적이라고 스스로 촛불이 되기조차 거부한다면 어쩌면 다른 사람의 촛불도 꺼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위해서 촛불이 되는 것이 어쩌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밀 포럼과 같은 모임이 활성화 되고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박사님의 말씀에서, 지금까지 “그래도 우리가 옳아.”라고 주장하는 게 이 모임이 아닌가 하는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노동에 대한 생각이 촛불이 되려면 대중에 가까워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법학은 오랜 시간 대중과는 먼 전문가의 영역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도 먼 이야기입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법학의 문장이 일상의 언어에서 벗어나 “법학의 문장”이었던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제성 박사님의 “아름다운 문장”이 법학 포럼을 들으러 온 저에게 낯선 문장으로 다가온 것처럼 일반적인 “법학의 문장”은 일반인에게 너무도 낯선 문장이었을 것 같습니다.
법학의 어원이 예술과 같다는 박사님의 말씀은 저에게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어원이 같다면 법학의 문장도 대중이 공감할 하나의 예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님의 서면이 명문으로 회자되고, 유시민 작가의 항소이유서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된 것은 그 법리에 대한 내용이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슴 속에서부터 쓰여진 아름다운 문장의 힘이 그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진심이 담긴 문장은 그 어떤 법리 보다 사람을 설득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앞으로 제가 쓰는 서면에 예술성이 가미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동이 돈으로 환산되며 사람도 돈으로 환산되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저도 그렇게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해밀이 노동은 돈이 아니고 노동자가 사람임을, 그 누구보다 존엄한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 곳이 되기를 원합니다. 해밀의 활동으로 많은 촛불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 일원으로 멀어지지 않고 함께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