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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연구소 해밀 포럼분과장

신권철(서울시립대학교 법전원 교수)


                                   시장 바깥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동네에서 서로의 얼굴을 알면서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몇 명인가? 세어보았다. 2분인 것 같다. 매일 1층 현관을 지나며 인사를 나누는 경비를 보아주는 어르신, 그리고 단지 내 흡연장소에 니어카를 끌고 다니시며 내 꽁초를 치워주시는 어르신. 꽁초를 치워주시는 그 어르신께는 나 스스로 뭔가 미안한 행위를 한 듯 눈을 잘 마주치지는 못 한다. 광고에서처럼 흡연은 범죄인 듯 싶어 민망하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그 꽁초와 쓰레기를 장갑 낀 손으로 들어내어 니어카 비닐봉투에 쓸어담는 그 행위를, 옆에서 연기를 뿜으며 쳐다보면서 난 어떤 할 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비노동자, 청소노동자. 그리고 그 노동에 함께하는 깊게 패인 나이들. 두 분 다 족히 70은 넘었으며, 니어카를 끄는 분은 걸음이 불편하다.

 

   그분들의 노동은 시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장은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월급이 결정되며, 아마도 최저임금법 때문에 그 가격은 자연상태와 다르게 조금 경직되어 있다고 배웠을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게다가 머릿 속에 그려진 추상적인 인간만을 배워 온 경제학이나 법학은 인간의 나이듦이나 희로애락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시장노동과 임금(화폐)에 관하여서도 그것이 가진 장점이나 효율성, 시장주체들의 권리(기본권)는 들어보았어도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시장 바깥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은 시장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부엌, 논밭, 낚시터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돌봄으로, 자연에 대한 가꿈으로, 일상의 여가로도 일어난다. 우리의 시장노동은 자기와 가족에 대한 금전적 부양을 벗어나지 못한다. 받은 월급의 한도 내에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시장노동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자신의 고용이나 영업만이 가족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장을 함께 걱정해주는 인형이 되었다. 시장이 안 좋을 때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제단에 오르는 것을 감수하고, 시장이 좋을 때에도 시장의 심기를 거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노동법은 실은 종속노동이 아닌 시장노동에 대한 법이다. 그러나 비시장노동까지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임금은 시장 속에 있음을 표시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임금 아닌 다른 수단으로 시장노동을 벗어나 시장 바깥의 아름다움을 찾아보아야 한다. 꽁초를 치워주시는 어르신이 최저임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상징과 존중 그리고 그 노동에 대한 사회적, 호혜적 증여로서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부터 그 고민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