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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 창립 10주년 기념식 및 심포지엄 축사



노동법연구소 해밀 고문

전수안 ( 前 대법관)



 한동안 자고 일어나면 ‘여성이 적’인 날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자고 일어나면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적인 듯합니다. “노동개혁 못하면 정치 경제 다 망한다. 화물노조 파업이 북핵 위협만큼 위험하다.” 오기 전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핵무기 연구소 10주년 축하행사에 참석해도 되나? 노동운동을 북핵 보듯 하면, 노동하는 전 국민을 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어쩌면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일찍이 우리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국가’라는 이유로 OECD 가입이 거절되었지요. 노사관계 법령을 국제기준(Internationally Accepted Standards)에 맞게 개정하기로 서약하고서야 간신히 가입이 승인된 것이 1996년. 그때 개정키로 서약한 ILO 협약 29호, 87호, 98호는 지난 해 2월에야 비준하였으니, 서약 이후 비준에 25년이 걸렸습니다. 요즘 회자되는 협약 87호만 하더라도 1948년 여름에 ILO에서 채택된 후 그 해 연말 UN인권선언 20조와 23조의 기초가 되었고 우리 헌법 21조에 수용되었는데도 말이죠. 정부가 아닌 사인 간에 25년씩 약속을 안 지켰더라면 이행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속였다고 보았을 것 같은데요. 지난 주(2022년 12월 첫째 주)에는 사법정책연구원이 ILO 및 유엔인권사무소와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노동인권과 ILO 기본협약 및 그 비준에 따른 국내 노동법의 여러 과제를 아우르는 국제회의까지 있었습니다. 김지형 소장께서도 좌장으로 참여하셨고요. 지난해에는 임금피크제, 사내하청, 특근거부 등에 관하여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렇듯 국제적으로 승인된 노동인권의 보편적 기준과 협약은 어느 한 국가만의 독특한 잣대로 무시하고 넘볼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정부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은 못 보았어도 훌륭한 신부님은 뵌 적이 있는데,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능을 잘 보려면 기도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존엄과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광장에 모이기에 앞서, 노동법 연구와 노동법치주의 실현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것이 더 강력하고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밀은 핵무기만큼 강력하고 무서운 단체가 맞습니다. 시민은 그 수준만큼의 정부와 의회를 갖는다고 하던가요. 노동법과 노동운동도 시민의 수준만큼이기 십상입니다. 일반 대중의 수준을 앞서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뜻일까요. 노동법 연구의 과정과 성과가 학계와 법조 전문가의 공유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시민에게 열린 공간이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선도할 리더입니다. 해밀은 노동의 현실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노동법이 노동의 현실을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 지혜를 모으는 길잡이, 향도가 되고자 하는 것이고요. 일찍이 그 창립선언에서 ‘노동법에 정통한 법률가의 육성과 노동법에 대한 시민교육’을 설립 목적으로 명시하였습니다. 요즘 월드컵 때문에 ‘중꺾마’라는 말이 회자하던데, 꺾이지 않는 마음에 하나 더 보태 보겠습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 해밀의 설립 정신이고, 해밀과 함께 한 여러분의 1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마음이 진실로, 진실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지형 소장의 표현을 빌리면 ‘해밀은 맑게 갠 하늘이지만, 비가 내리고 있다면 맑게 갠 하늘이란 기다림을 견디는 일’이고, 인용하신 노동시인의 말처럼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입니다. 10년을 함께 비 맞으면서 스스로 길이 되고자 맑은 하늘을 기다려오신 모든 분께 해밀의 창립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노동법 대가이자 카돌릭 신자이신 김지형 소장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하신 것을 혹시 아시는지요. “쉬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질병이다.” 의사처럼 단호히 진단하셨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 기적을 이루느라 기쁨을 잃은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아오는 동안 강요당한 것은 언제나 노동 그리고 노동의 성과였습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Citius, Alyius, Fortius!)’ 라는 채찍질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을 즐겁게 만드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노동하는 시민의 일생을 통해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건강하고 행복한 노동자로 살아서 귀가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최근 5년간 과로사가 2,500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사건·사고가 아니어서 뉴스에 나오지도 않고 법원의 판결이나 관련 기구의 판정을 받기 전에는 과로사를 ‘과로사’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이 시점에서 미룰 수 없는 것은 기계처럼 로봇처럼 장시간의 노동을 반복·재생하는 일이 아니라, 기계도 로봇도 아닌 숨 쉬는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 일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보호하느냐가 사회선진화의 척도가 된다는 견해는 언제나 옳습니다. 왜 그런지 저도 노동시인의 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몸과 마음을 다쳐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노동자가 사회의 중심,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당장의 현실은 잔인하지만 언젠가 또 다른 어느 연말쯤에는, ‘노동자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보다 다른 무엇을 우위에 두는 사고가 우습게 보이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10년간 해밀 연구소의 소장은 김지형, 김진은 운영위원, 심지어 제가 아직도 고문이라는 사실, 처음엔 놀랐는데 고무적이기도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앞으로도 노동문제는 씨가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해밀 또한 내내 발전하고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런 소망이 가능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해밀 100주년 기념식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