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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 제7호 01. 해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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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 연구소 포럼분과장

신권철 (서울시립대 교수)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하여

 

20197월부터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노동법의 규율이 시작된다. 우리가 지금 불법이라 느끼는 가정폭력, 학교 내 체벌, 직장 내 성희롱도 30년 전에는 법이 접근해 들어오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그것은 사회통념상 묵인되거나, 법이 노골적으로 승인하거나(친권자나 학교의 징계권), 국가의 법이 의식적으로 침투를 자제하는 자치적 영역이었다.

한 세대가 흘러가며 권위를 통한 지배의 힘들은 무력해지고, 저항할 수 있는 목소리는 점차 강해지면서 가정에서는 아동학대라는 이름으로, 학교 내의 체벌은 학교폭력의 하나로, 직장 내 성희롱은 불법행위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법의 영역으로 포섭되어지고, 피해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구제절차들도 마련되었다. 그 결과 각 공동체 내의 가시적인 폭력은 감소하였지만 공동체의 관리자들은 비가시적인 폭력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종속된 사람들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을 향하였다. 정신적 괴롭힘이 이제 신체적 폭력을 대신하여 각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특수한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도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괴롭힘을 정의할 수 있을까? 괴롭힘의 결과인 고통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괴롭힘은 언행으로, 그리고 부작위로도 가능하며, 심지어 눈빛만으로도 가능하다. 게다가 날 괴롭히는 사람은 직장 말고도 학교, 가정 도처에 널려 있다. 괴롭힘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직장 내 괴롭힘이 특별한 것은 그 괴롭힘에 내가 계약으로서 동의하였다는 점이다. 너는 나의 말에 이의 없이 따르기로 한 이상 나의 언행은 너에게 더 이상 괴롭힘이 될 수 없다. 만약 괴롭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계약을 해지할 자유가 있으니 언제든 그리 하라. 이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용자의 목소리다.

 

이렇게 거부나 저항이 무기력해지는 공간에서 인간의 영혼은 사라지고, 인격은 사물화 된다. 지난 정부의 관료나 판사들이 직권남용 등의 수사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이 영혼이 없었음을, 즉 자신은 아무 판단도 없이 시키는 일만 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법적 책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이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영혼을 버렸다는 것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이렇게 지배는 피지배에 의해 완성된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상관을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라고 신고라도 했어야 자기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근로기준법이 만들어 낸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규율은 새롭다. 일터에서의 상하동료관계에서 모든 언행과 눈빛이 괴롭힘이라는 필터로 심사대상이 된다. 어릴 적의 학교에서처럼 쟤가 날 괴롭혀요라는 말 한마디에 선생님은 재판장이 되어 이리저리 물은 후 판결을 내려준다. 판결 중 하나는 자리를 바꾸어 멀리 떨어뜨려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린 것이 아닌 이상 괴롭힘은 학교에서도 그렇듯이 직장 내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법은 괴롭힘을 직장 내 우위를 이용한 업무일탈행위라는 보일 듯 말 듯 한 모습으로 가시화시킨다. 결국 사업장 내에서는 조사기관을 만들어 조사하고, 위원회를 꾸려 가해자의 어떤 행위나 태도를 놓고서 그것이 괴롭힘인지 아닌지를 논의해 판정하고, 사용자가 그 판정에 따라 피해자에게는 보호조치를, 가해자에게는 제재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가히 사업장 내 재판이라 할 수 있다. 국가는 대체로 그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와 달리 괴롭힘 문제에 대해서는 일터 내에서의 자치적 해결을 법은 기대하고 있다. 그 전제는 공정한 절차와 정의로운 결과이다. 그렇다면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 구제절차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장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기도로서 아니면 법으로서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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